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는 사람이 늘 겹겹이 서 있는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유리 너머의 그림은 생각보다 작고, 대부분의 관람객은 앞사람 어깨 사이로 겨우 한 번 눈을 맞추고 밀려 나오죠. 〈모나리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평생 완성한 회화는 스무 점이 되지 않습니다.

빈치 마을의 소년, 옮겨 다닌 호기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519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름의 '다 빈치'는 성이 아니라 빈치 출신이라는 뜻이에요.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지만 그는 혼외자로 태어났고,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는 길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었습니다. 대신 그가 향한 곳은 피렌체였어요.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웁니다. 당시 공방은 그림만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조각과 금속 세공이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이뤄지는 작업장이었고, 재료를 다루는 손은 그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그의 호기심이 공방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데 있어요. 그는 사람 몸의 속을 들여다보는 해부학에 매달렸고, 수학과 공학을 파고들었고, 아직 만들 수 없는 기계를 그렸습니다. 그림 한 점을 붙들고 있다가도 다른 물음이 떠오르면 그쪽으로 건너갔고, 옮겨 다닌 자리마다 노트가 쌓였어요. 남아 있는 그의 노트는 수천 페이지에 이릅니다.

그 노트에는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글씨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좌우가 뒤집힌 채 적혀 있어요. 거울에 비춰야 제대로 읽히는 이 거울 글씨를 두고 비밀을 감추려던 암호라는 해석도 있지만, 왼손잡이가 잉크를 번지지 않게 쓰다 보니 굳어진 습관이라는 설명이 더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노트를 채운 것은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관찰과 계산과 메모였어요. 이런 종이 위 작업을 부르는 이름이 여럿인데, 무엇이 스케치이고 무엇이 데셍인지는 드로잉, 스케치, 데셍의 차이에서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안 맨(Vitruvian Man · Uomo Vitruviano), 1490년경, 종이에 펜·잉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안 맨(Vitruvian Man · Uomo Vitruviano), 1490년경. 종이에 펜·잉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사람의 몸을 원과 사각형 안에 끼워 맞춰 본 이 한 장은, 그리는 일과 재는 일이 그에게 서로 다른 작업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스푸마토, 경계를 지우는 손

그렇게 넓게 흩어져 있던 관심이 화면 안에서 한 점으로 모이는 자리가 있습니다. 스푸마토(sfumato)예요. 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윤곽선을 긋는 대신 밝고 어두운 색을 아주 얇게 여러 겹 쌓아, 형태의 가장자리를 안개처럼 풀어 놓는 기법이에요. 선 하나로 끝날 일을 얇은 겹을 여러 번 쌓아 대신하는 셈이니 시간이 오래 걸려요. 대신 그림에서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부터가 배경인지 눈으로 짚을 수 없게 돼요.

스푸마토가 하는 일: 선을 긋지 않고 경계를 풀기 윤곽선을 긋는 그림 스푸마토로 푼 그림 경계가 한 줄로 딱 떨어집니다 경계가 안개처럼 풀립니다 sfumato는 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 지워진 경계는 보는 사람의 눈이 채웁니다
윤곽선을 그으면 형태가 어디서 끝나는지 눈이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그 선을 지우고 명암만 겹겹이 쌓으면 판단할 근거가 사라지고, 빈자리를 보는 사람의 눈이 매번 조금씩 다르게 채우죠. 〈모나리자〉의 미소가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이유입니다.

미소의 비밀이라 불리는 것도 결국 여기서 나옵니다. 입꼬리와 눈가처럼 표정을 결정짓는 자리가 하필 스푸마토로 흐려져 있거든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인상은 그림이 부린 마술이 아니라, 판단을 보는 쪽에 떠넘긴 결과에 가깝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Mona Lisa), 약 1503~1519, 패널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소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Mona Lisa), 약 1503~1519. 루브르 박물관 소장. 1503년경 붓을 들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 두고 손본 그림이라, 제작 연도가 한 해가 아니라 열여섯 해의 폭으로 적힙니다.

〈최후의 만찬〉, 혁신이 치른 값

1495년부터 1498년 사이, 그는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수도사들이 밥을 먹는 방의 한쪽 벽 전체가 화면이었죠.

당시 벽화의 표준은 프레스코였어요. 젖은 회벽에 물감을 얹어 벽이 마르는 동안 색이 벽 자체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인데, 회벽이 마르기 전에 끝내야 하니 하루치 면적을 정해 놓고 빠르게 그려야 했습니다. 고쳐 그릴 여유가 거의 없는 기법이에요.

그런데 다 빈치는 빠르게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들여다보고, 얇게 겹쳐 쌓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손대는 사람이었죠. 스푸마토도 그렇게 해야 나오는 기법이고요. 그래서 그는 프레스코를 버리고 마른 벽에 템페라를 얹는 방식을 택합니다. 원하는 만큼 천천히, 원하는 만큼 다시 손댈 수 있는 화면을 얻은 거예요.

대가는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벽에 스며들지 못한 물감층은 표면에 얹힌 채로 남았고,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뜨고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후 수백 년 동안 이 벽화는 덧칠과 복원을 거듭하며 겨우 형태를 지켰습니다. 우리가 보는 화면에서 화가의 손이 직접 닿은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그래서 간단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됐어요.

프레스코를 버린 선택은 실수라기보다 그가 그림을 대하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손댈 수 없는 기법으로는, 끝까지 손대는 화가가 될 수 없었으니까요.

그림이 프랑스로 간 이유, 그리고 1911년

〈모나리자〉가 왜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에 있는지 궁금해하는 분이 많아요. 답은 화가의 마지막 몇 해에 있습니다.

1519년, 다 빈치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앙부아즈에 머물다 그곳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이탈리아를 떠날 때 〈모나리자〉는 짐 속에 함께 있었어요. 1503년경 그리기 시작해 마지막까지 곁에 두고 손보던 그림이었으니, 넘기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죠. 루브르에 걸린 〈모나리자〉는 어느 날 프랑스로 옮겨진 그림이 아니라, 화가가 직접 짐에 넣어 국경을 넘은 그림입니다.

다만 이 그림이 다른 걸작들과 다른 지위를 얻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에요. 결정적인 사건은 1911년에 일어납니다.

그해 〈모나리자〉가 루브르에서 사라졌습니다. 훔친 사람은 루브르에서 일한 적이 있는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였어요. 그는 그림을 이탈리아로 가져갔고, 1913년 피렌체에서 팔려다 붙잡힙니다. 그림이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1914년 1월이었죠.

2년 남짓한 이 공백이 그림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신문마다 사라진 그림의 사진이 실렸고, 그림이 걸려 있던 빈 자리를 보러 사람들이 루브르를 찾았다고 전해져요. 도난 전까지 〈모나리자〉는 루브르가 지키는 여러 걸작 가운데 하나였지만, 사건이 끝났을 때는 이름 자체가 뉴스가 된 그림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나리자〉가 지나온 길
1503년경
피렌체에서 그리기 시작. 화가는 이 그림을 끝내 넘기지 않고 곁에 두었습니다.
1519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머물던 앙부아즈에서 화가 사망. 그림은 프랑스에 남습니다.
1911년
루브르에서 일한 적 있는 빈첸초 페루자가 그림을 훔쳐 이탈리아로 가져감.
1913년
피렌체에서 그림을 팔려다 검거.
1914년 1월
프랑스로 반환. 2년 남짓의 실종이 이 그림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루브르처럼 작품을 파는 대신 맡아 지키는 공간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는 미술관과 갤러리, 뭐가 다른가요에서 짚었고, 대표작 한 점 앞에 사람이 겹겹이 서는 전시를 어떻게 견디며 볼지는 대형 거장전, 어떻게 봐야 할까요에 정리돼 있어요.

스무 점이 남긴 것

완성작의 수만 놓고 보면 다 빈치는 성실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주문을 받고도 끝내지 않은 그림이 있었고, 시작해 놓고 다른 물음으로 건너간 화면도 있었어요. 같은 시대의 여러 화가가 그보다 훨씬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스물세 살 아래였던 미켈란젤로는 아예 반대편에 서 있어요. 천장 하나를 4년 동안 붙들고 끝까지 파고든 사람이었으니, 같은 시대의 정반대 선택이 궁금하다면 미켈란젤로 입문을 이어서 읽어 보세요.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남은 이유는, 점수를 매길 항목이 애초에 그림의 수가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그는 얼굴을 그리려고 얼굴 밑의 근육을 들여다봤고, 빛이 형태를 어떻게 감싸는지 알아내려고 물감을 얇게 겹겹이 쌓았습니다. 그렇게 알아낸 것의 상당 부분은 그림에 다 쓰이지 못한 채 노트에 남았고요.

그러니 그가 남긴 것은 완성된 화면 스무 점이라기보다, 무엇이든 끝까지 들여다보면 그리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림이 답을 내주지 않고 보는 사람에게 판단을 넘기는 방식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 낯섦이 어디서 오는지는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에서 따로 다뤘어요.

작품 한 점 앞에서 시간을 어떻게 쓰면 좋은지는 미술관, 어떻게 봐야 하나요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다음에 〈모나리자〉를 만나거든, 앞사람 어깨 너머로 한 번 눈을 맞추고 밀려 나오는 대신 얼굴의 가장자리를 잠깐 들여다보세요. 어디서 뺨이 끝나고 어디서 어둠이 시작되는지 짚어 보려는 그 몇 초가, 스무 점이 채 되지 않는 완성작을 남긴 사람의 손에 가장 가까이 닿는 순간이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다빈치는 왜 유명한가요?

완성한 회화가 스무 점도 되지 않는데 미술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됐어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같은 대표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림에 머무르지 않고 해부학과 수학, 공학과 발명을 함께 파고들며 수천 페이지의 노트를 남긴 사람이라는 점이 큽니다. 관찰하고 기록하는 방식 자체가 유산으로 남은 셈이에요.

모나리자는 왜 그렇게 유명한 그림이 됐나요?

그림 자체의 완성도도 있지만 1911년의 도난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루브르에서 일한 적 있는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가 그림을 훔쳐 이탈리아로 가져갔고, 1913년 피렌체에서 팔려다 붙잡혀 1914년 1월 프랑스로 돌아왔어요. 2년 남짓 사라져 있는 동안 쏟아진 보도가 이 그림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의 자리로 밀어 올렸죠.

스푸마토가 뭔가요?

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이라는 뜻의 회화 기법입니다. 윤곽선을 긋는 대신 밝고 어두운 색을 아주 얇게 여러 겹 쌓아 형태의 가장자리를 안개처럼 풀어 놓죠.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부터가 배경인지 눈으로 짚을 수 없게 되고, 그 빈자리를 보는 사람이 채우게 돼요. 〈모나리자〉의 미소가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이유입니다.

모나리자는 왜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에 있나요?

화가가 직접 들고 갔기 때문이에요. 다 빈치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앙부아즈에 머물렀고 1519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탈리아를 떠날 때 〈모나리자〉가 짐 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1503년경 시작해 마지막까지 곁에 두고 손보던 그림이라 끝내 넘기지 않았던 거죠.

다빈치가 남긴 그림은 몇 점인가요?

완성된 회화로 인정받는 작품은 스무 점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의 손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를 두고 학자마다 판단이 갈려 정확한 숫자를 하나로 못 박기는 어려워요. 대신 드로잉과 메모로 채운 노트는 수천 페이지가 남아 있어, 그의 작업량은 완성작의 수보다 이쪽에서 훨씬 잘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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