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고갱의 그림 앞에 서면 색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들판이 통째로 붉고, 사람의 살갗이 노랗고, 그늘이 앉아야 할 자리에 엉뚱한 색이 놓여 있어요. 실제로 그렇게 보였을 리 없는데 이상하게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폴 고갱은 색을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기는 일에서 놓아준 화가예요. 그리고 그 색이 그를 어디까지 데려갔는지는, 그림만큼 간단하게 정리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른다섯에 접은 안정된 생활

폴 고갱(Paul Gauguin)은 1848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년기의 얼마간은 페루에서 보냈어요. 어린 시절을 유럽 바깥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뒷날 그가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즐겨 꺼내 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인이 된 그는 파리에서 주식 중개 일을 했습니다. 수입이 넉넉한 직업이었고, 그림은 어디까지나 취미였어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사 모으고 틈틈이 붓을 드는 쪽이었죠.

그러다 서른다섯 무렵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기로 합니다. 안정된 생활을 접은 거예요. 당시 그에게는 아내와 다섯 아이가 있었고, 수입이 끊긴 뒤 가족과는 결국 멀어졌습니다. 화가로서의 출발점에 이 선택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해요. 이후 그의 행로는 계속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거든요. 있던 자리를 접고 더 먼 곳으로 옮겨 가는 방향으로요.

윤곽선을 두르고, 색을 평평하게

화가가 된 뒤 그가 오래 머문 곳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 서북부 브르타뉴의 퐁타방입니다. 물가가 싸서 주머니가 가벼운 화가들이 모여들던 마을이었어요. 여기서 그는 젊은 화가들과 어울리며 자기 방식을 굳혀 갑니다.

방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두 가지였어요. 형태의 둘레에 굵은 윤곽선을 두르고, 그 안을 그늘 없이 평평한 색으로 채우는 겁니다. 뒷날 이 방식은 종합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당시 회화의 기본기는 정반대였어요. 빛이 닿는 쪽과 닿지 않는 쪽을 나눠 색을 서서히 어둡게 깔면서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상식이었죠. 고갱은 그 단계를 통째로 걷어냅니다. 남은 것은 선으로 끊긴 형태와 그 안을 채운 한 덩어리의 색이었어요.

폴 고갱, 설교 후의 환영(La Vision après le sermon), 1888, 유화,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폴 고갱, 〈설교 후의 환영〉, 1888.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앞쪽에는 흰 머릿수건을 쓰고 기도하는 브르타뉴 여인들이, 붉은 들판 건너편에는 씨름하는 야곱과 천사가 한 화면에 함께 있습니다.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 그림에서 붉은색이 하는 일을 보세요. 들판이 붉어서 붉게 칠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고 나온 사람들의 머릿속에 성경 속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을 그린 것이고, 붉은색은 그 순간에 붙은 색이에요. 색이 대상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감정과 상징 쪽으로 건너간 겁니다.

색이 맡는 일이 달라지는 자리 개념 도식 본 대로 옮긴 색 대상이 색을 정한다 그늘을 깔아 덩어리를 만든다 고갱 느낀 대로 칠한 색 화가가 색을 정한다 윤곽선을 두르고 평평하게
실제 작품이 아니라 색이 맡는 역할만 옮긴 도식이에요. 왼쪽에서는 대상이 색을 정하지만 오른쪽에서는 화가가 색을 정합니다. 고갱의 화면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색을 못 맞춰서가 아니라, 애초에 색을 맞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인상주의 다음을 각자 다른 방향에서 찾아 나선 화가가 셋 있습니다. 세잔은 대상 아래에 놓인 구조를 찾았고, 고흐는 붓질과 색으로 자기 안의 것을 쏟아 냈으며, 고갱은 색 자체를 상징의 자리로 옮겼어요. 셋을 후기인상주의로 묶어 부르지만 향한 방향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세잔이 왜 구조 쪽으로 갔는지는 세잔 입문에, 이 갈래가 사조 전체의 지도에서 어디쯤 놓이는지는 미술 사조, 5분 만에 따라잡기에 정리돼 있어요.

아를의 두 달, 그리고 그 끝

1888년 10월, 고갱은 남프랑스의 아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기다린 사람이 반 고흐였어요. 고흐는 화가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꿈꿨고, 그 첫 손님이 고갱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집에서 지내며 서로의 작업을 곁에서 지켜봤지만, 그림에 대한 생각부터 어긋났어요. 고흐는 대상을 눈앞에 두고 그 앞에서 그려야 한다는 쪽이었고, 고갱은 대상에서 떨어져 기억과 상상으로 화면을 짜는 쪽이었습니다. 부딪히는 일이 잦았죠.

동거는 두 달 남짓 만에 끝납니다. 12월 말, 고흐가 자기 귀를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고 고갱은 아를을 떠났어요. 함께 살자던 계획은 여기서 멈춥니다. 이 두 달을 고흐 쪽에서 본 이야기는 반 고흐 입문에 담겨 있어요.

63일의 항해 끝에 닿은 섬

1891년, 고갱은 타히티로 떠납니다. 배로 63일이 걸리는 길이었어요.

그가 내세운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유럽 문명이 닿지 않은 곳에서 때 묻지 않은 삶과 색을 찾겠다는 거였죠. 파리 화단에서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한 사정도 함께 있었고요.

그런데 배에서 내린 타히티는 그가 그리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프랑스 행정 조직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선교가 이루어졌고, 유럽식 옷과 제도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문명 바깥은 그가 도착하기 훨씬 전에 이미 유럽의 손을 한 차례 거친 상태였던 거예요.

고갱은 이 간극을 기록하는 대신 지웠습니다. 화면에서 식민지의 흔적을 걷어내고, 유럽 관람자가 기대할 법한 낙원의 모습을 채워 넣었어요. 그의 타히티 그림이 아름다운 만큼 조심해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만난 섬이라기보다 그가 만들어 낸 섬에 가깝거든요.

있던 자리를 접고 더 먼 곳으로 생애 이동 경로 파리 1848 태어나고 일하다 퐁타방 1880년대 후반 윤곽선과 색면 아를 1888 고흐와 두 달 타히티 1891 63일의 항해 마르키즈 1901 1903년 그곳에서 1891년 고갱이 배에서 내렸을 때 타히티는 이미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파리에서 마르키즈까지, 고갱은 계속 더 먼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다만 그가 찾던 문명 바깥에는 매번 유럽이 먼저 도착해 있었어요. 그가 지운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사실이었습니다.

오늘날 고갱 앞에 함께 놓이는 것

고갱의 이름에는 오늘날 한 가지 이야기가 더 따라붙습니다.

타히티와 마르키즈에서 그는 당시 10대였던 현지 소녀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중 몇 사람은 그의 화면에 그대로 올랐습니다. 식민지의 프랑스인 남성과 피식민지의 어린 여성 사이에 놓인 힘의 차이를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는 관계였어요. 여기에 앞에서 본 낙원의 이미지까지 겹칩니다. 20세기 후반 이후 연구자들은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지 않고 함께 읽어 왔고, 여러 미술관도 전시 해설에 이 맥락을 나란히 적는 쪽으로 옮겨 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그림의 평가와 뒤섞을 필요는 없어요. 색을 재현에서 풀어놓은 그의 화면이 20세기 회화에 남긴 자리는 그것대로 사실이고, 그 화면을 만든 사람이 한 일도 그것대로 사실입니다. 둘 중 하나를 지워야 다른 하나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에요. 미술관에서 고갱의 방에 들어설 때 두 가지를 함께 알고 있는 편이, 그림을 더 정확하게 보게 해 줍니다.

낙원은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려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보면 화면의 색은 흐려지는 대신 오히려 또렷해져요.

세 개의 질문을 적어 넣은 그림

1897년에서 1898년 사이, 고갱은 가로 4미터에 가까운 큰 화폭 하나를 완성합니다. 병과 빚에 시달리며 죽음을 생각하던 시기였어요.

제목은 그림 안에 적혀 있습니다. 화면 왼쪽 위 노란 모서리에 프랑스어로 세 개의 질문이 쓰여 있어요.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 Que sommes-nous ? Où allons-nous ?), 1897~1898, 유화, 보스턴 미술관 소장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 보스턴 미술관 소장. 오른쪽 끝에 누운 갓난아기에서 왼쪽 끝에 웅크린 노인까지, 한 사람의 일생이 한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화면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훑어보세요. 오른쪽 끝에 갓난아기가 누워 있고, 한가운데에는 팔을 위로 뻗어 열매를 따는 사람이 서 있고, 왼쪽 끝에는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태어남과 살아감과 늙음을 한 줄에 늘어놓은 셈이죠. 뒤쪽에 선 푸른 상은 특정한 신을 그대로 옮겼다기보다 고갱이 여러 곳의 형상을 참고해 만들어 낸 쪽으로 봅니다.

그림은 보스턴 미술관에 있습니다. 미술관이 1936년에 사들였어요. 세 개의 질문을 걸어 놓은 화가는 정작 답을 적어 두지 않았습니다.

고갱의 화면에서 챙길 세 가지
형태를 끊는 윤곽선
형태의 둘레가 선으로 또렷하게 끊겨 있습니다. 그 선 덕분에 색이 서로 번지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켜요.
평평한 색면
그늘을 깔아 덩어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한 번에 칠한 색이 그대로 한 장의 면으로 남아 있죠.
색을 고른 이유
색이 대상을 따라가지 않을 때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뜻하려 했는지를 먼저 물어보세요.

1901년 고갱은 타히티보다 더 외딴 마르키즈 제도로 옮깁니다. 그리고 1903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쉰넷이었습니다.

생전의 그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파리 화단에서의 자리도 끝내 좁았어요. 평가가 뒤집힌 것은 세상을 떠난 뒤 파리에서 열린 회고전이 계기였습니다. 거기서 그의 화면을 본 다음 세대가 곧바로 반응했어요. 색을 대상에서 떼어 낸 화면은 마티스 입문이 다루는 야수주의로 이어졌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오래된 약속을 놓아 버린 태도는 피카소 입문이 짚는 1907년의 화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고갱의 그림 앞에 서면 색이 먼저 말을 겁니다. 그 색이 대상에서 풀려나면서 20세기 회화의 문 하나가 열린 것도 사실이고, 그 색을 찾아 떠난 길 위에 지워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두 가지를 함께 들고 그림 앞에 서 보세요. 붉은 들판과 노란 살갗이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자주 묻는 질문

고갱은 왜 유명한 화가인가요?

색을 대상에서 풀어놓은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형태 둘레에 굵은 윤곽선을 두르고 그 안을 그늘 없이 평평한 색으로 채워, 색이 눈에 보이는 사실을 옮기는 대신 감정과 상징을 맡게 했어요. 이 방식이 20세기 초 야수주의를 비롯한 여러 갈래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고갱과 반 고흐는 무슨 사이였나요?

1888년 가을, 고갱은 반 고흐가 있던 남프랑스 아를로 내려가 한집에서 지냈습니다. 고흐가 꿈꾼 화가 공동체의 첫 손님이었죠. 다만 대상을 앞에 두고 그리려는 고흐와 기억으로 화면을 짜려는 고갱은 자주 부딪혔고, 동거는 두 달 남짓 만에 파국으로 끝났어요.

고갱은 왜 타히티로 갔나요?

유럽 문명이 닿지 않은 곳에서 때 묻지 않은 삶과 색을 찾겠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습니다. 파리 화단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사정도 있었고요. 1891년 배로 63일을 항해해 닿았지만, 정작 도착한 타히티는 이미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죠.

고갱의 대표작은 무엇인가요?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가로 4미터에 가까운 대작으로,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한 사람의 일생을 한 줄에 늘어놓았어요. 보스턴 미술관이 1936년에 사들여 소장하고 있어요.

고갱을 둘러싼 논란은 무엇인가요?

타히티와 마르키즈에서 그는 당시 10대였던 현지 소녀들과 관계를 맺었고, 화면 속 원시 낙원도 실제 섬의 모습이라기보다 유럽 관람자를 향해 만들어 낸 이미지에 가까웠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오늘날 여러 미술관이 전시 해설에 이 맥락을 함께 적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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